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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대상 수상작 「봄을 걷는 동안」
“나 3월에 결혼식 올리려고.” 언니의 말에 엄마와 나는 떨리는 서로의 손을 부여잡으며 웃음을 지었다. 언니에겐 대학생 때부터 7년간 사귀어온 남자 친구가 있었고 둘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서로의 연인인 동시에 든든한 친구이자 선생 역할을 해왔다. 앞으로도 그럴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며 언니는 결혼을 이야기했다. 그래그래 우리도 그렇게 믿는단다. 엄마는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을 글썽였다. 눈물은 금세 나에게도 언니에게도 옮아갔다. 문제는 아빠였다. 그는 언니의 결혼 소식에 환하게 웃지 못했다. 허허 웃으며 축하해주긴 했으나 언니는 보고 말았다. 아빠의 웃음 뒤에 아주 잠시 비친 슬픈 표정을. 엄마와 내가 흘린 눈물보다 더 무거운 눈물이 그의 얼굴 깊숙한 곳에 맺혀있음을. 엄마와 내가 웨딩드레스니, 신혼집이니 조잘댔지만 아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내 조용히 안방으로 들어갔다. 예비 사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빠가 본래 감정표현이 격한 사람이 아니라서? 언니는 둘 다 아닐 거라고 했다. 아빠는 종종 언니의 남자 친구와 단둘이 식사하거나 야구를 보러 다녔다. 언뜻 아빠와 언니의 남자 친구가 부자지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언니의 남자 친구를 처음 만난 날부터 지인들에게 자기 딸이 얼마나 좋은 사람과 만나고 있는지 자랑하고 다니기도 했다. 그래서 언니는 더욱 당혹스러웠다. 아빠야말로 누구보다 자신의 결혼을 기뻐할 거라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며칠이 지나면 평소대로 돌아올 거라던 엄마의 예상과 달리 아빠는 내리 안방에 앉아 멍하니 티브이만 응시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냐는 나의 물음엔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언니는 영문도 모른 채 아빠와 어색한 상태를 유지했다. 웨딩플래너를 만나 식장을 예약하고 드레스를 맞추고 청첩장을 골랐다. 세부적으로 결혼식 당일 일정을 정하는 와중, 웨딩플래너의 한 마디가 언니의 마음에 날카롭게 꽂혔다. “그럼 신부님, 입장은 어떻게 진행할까요? 예전에는 신부 측 아버지와 나란히 입장하곤 했는데, 최근 들어서는 신부 혼자서 입장하는 분들이 더 많아요.” 아빠는 언니가 고등학생일 때 다리 한쪽을 잃었다. 당시 그가 근무하던 곳은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에 빵을 납품하는 공장이었다. 빵을 자르던 기계에는 자동멈춤 장치가 없었고 그 기계를 도맡은 사람은 아빠 혼자였다. 휴식시간 없이 열 시간 동안 내리 일하던 그는 그 스스로 멈출 리 없는, 도시의 커다란 송곳니 같은 기계에 순식간에 발이 끼었다. 온몸이 끼어 죽을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그의 비명을 듣고 멀리서 달려온 동료가 기계를 멈춰주었다고 했다. 공장 측은 사고를 ‘노동자의 부주의함’때문이라며 아빠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이 사실을 언니가 방송사에 끈질기게 제보한 끝에 공론화되어 햄버거 가게를 불매하는 시민들이 생기기도 했다. 이런 여론이 일자 급기야 공장 측은 입장을 바꾸어 아빠의 사고를 산업 재해로 인정하고 보상금과 치료비를 지불했다. 대형 병원의 보장구실을 수십 번 오간 끝에, 아빠의 잡아먹힌 다리 한쪽은 전보다 더 얇고 딱딱한 다리로 돌아왔다. 그는 금세 의족 생활에 적응했으나 한여름에도 긴 검은 바지를 꺼내 입었다. 그맘때쯤 자신과 키가 비슷하게 자란 언니가 어깨동무로 절뚝이는 발을 보조해 줄 때마다 아빠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빠랑 나란히 입장할 거야. 그런 줄 알아.” 언니가 안방 문을 벌컥 열어 소리쳤다. 씩씩거리는 언니 앞에서 아빠는 끝내 입을 열었다. “너 창피하게 내가 식장 한가운데에서 절뚝이면 어떡하니…….” 의족은 탁,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 쳤다. 그 미세한 떨림을 집에 있던 모두가 느꼈다. 마치 오래 걷거나 조금이라도 뜀박질을 한 날이면 평소보다 세게 진동하던 의족의 발목 부분처럼. 그러나 언니는 결혼을 선언할 때보다 더 견고한 목소리와 자세로 자기가 정말 창피해할 것 같냐며 물었다. 아빠는 대답이 없었다. 단지 언니의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어떤 결의를. 결혼식 전날 밤, 언니는 신발장 앞에서 한참을 쭈그려 앉아 아빠의 검은 구두를 닦았다. 아빠가 직접 시내에 나가 사 온 구두였다. 사고 이후로 아빠가 자기 신발을 산 것은 처음이었으므로 엄마와 나, 언니는 암묵적으로 그의 결심을, 진동을 보았다. 언니가 그 검은 구두를 닦을 때, 모두가 잠들었으리라고 생각했겠지만 실은 모두 깨어있었다. 신발장에서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를 애써 모르는 체 하면서. “자, 그럼 신부 입장!” 문이 열리자, 여느 때처럼 팔짱을 낀 언니와 아빠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한 발자국 나아갈 때마다 아빠의 바짓단과 구두 사이로 금속 다리가 보였다. 쏟아지는 박수갈채와 하객들의 미소를 배경 삼은 두 사람의 걸음은, 다소 느렸다. 떨림이 설렘으로 천천히 번져나가는 순간이었다. 지난밤 언니가 신발장 앞에서 흘린 눈물처럼 아빠의 절뚝이는 걸음처럼 결혼식장은 충분히 반짝였다.
2024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최우수상 수상작 「뱀파이어의 취업 준비」
환한 낮은 위험하다. 적어도 언니에게는 그렇다. 으슥한 길목이나, 인적 드문 산책로에서 언니는 안식을 느낀다. 사람이 많든 적든 간에, 언니는 주위를 살필 수밖에 없는 어둠 속을 좋아한다. 함부로 속도를 높여 뛰거나 달리지 않고 조심하는 발들을 지켜본다. 뱀파이어가 따로 없다. 그래서 우리의 약속 시간은 항상 저녁 어스름이다. 너무 저녁에 헤어질 수는 없으므로, 해가 질 즈음 나와 완전히 질 때 신나게 놀고, 깜깜해지면 집으로 돌아간다. 내 핸드폰에 언니는 뱀파이어라고 저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전장연 시위가 한창일 때, 30분가량 멈춘 지하철 안에서 언니는, “또 장애인들이 일반인 피를 말리네.” 그런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 말을 내게 전한 날에 나는 얼른 언니 저장명을 바꾸려고 핸드폰을 꺼냈지만, 언니는 됐다며 피식 웃었다. 언니는 성인이 된 이후에 소리를 잃었다. 언니의 소리는 물속에 풍덩 빠진 것처럼 먹먹해졌다가 물 위로 올라오지 못했다. 돌발성 난청이었다. 듣지 못하면 말하기도 어려워진다는 걸 언니를 보고 처음 알았다. 오늘도 언니는 헤드폰을 끼고 왔다. 언니는 주변 기척을 잘 느끼지도 듣지도 못했다. 도보로 다니는 킥보드, 전동 자전거, 차, 뛰어오는 사람까지. 어느 순간부터 언니는 노이즈 캔슬링이 되는 헤드폰을 아무 노래도 틀지 않고, 노이즈 캔슬링도 켜지 않고 쓰고만 다녔다. 이걸 머리에 끼고 있으면 저 사람은 저걸 끼고 있어서 소리가 안 들리겠구나, 라고 생각하고 알아서들 피한다고. 물론 그래도 일은 일어났다. 지난번 낮에는 골목을 걷고 있다가 뒤에서 울리는 경적에 놀라 주저앉았다고 했다. 차에 타고 있던 사람은 언니의 헤드폰을 가리키며 화를 쏟아내다가 언니가 청각 장애를 갖고 있다는 걸 들은 후에야 사과했다고 했다. 그러나 언니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리고 다시 보지 않을 것 같은 사람에게까지 청각 장애가 있다는 걸 말하고 싶지 않아 했다. 그 송구스럽고 불편해지는 표정을 보고 있자면 숨이 턱 막혀온다고 언니는 말했다. “또 떨어졌어. 면접도 못 갔는데 이번 거는.” 언니가 말했다. 나는 언니의 입가에 귀를 바짝 대고 있었다. 언니의 발음은 어눌하지만 선명하다. 따듯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내게는 그렇게 들린다. 언니는 취업 준비에 한창이었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교에 가뿐하게 현역으로 들어갔다. 긴 입시 끝에 겨우 학교에 들어간 나와는 달랐다. 그런데 갓 취업 전선에 들어온 나와 같이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언니는 작년, 경리로 일하던 회사를 그만뒀다. “회사는 많으니까. 그리고 백수일 때가 제일 좋지 않아?” 나는 천천히 입 모양을 과하지 않게 벌리며 대답했다. 언니 귀에는 보청기가 꽂혀있다. 내가 너무 크게 말하거나, 너무 빠르게 말하지만 않으면 언니는 내 말을 들을 수 있다. “그건, 그래.” 언니와는 만나고 싶지 않아도 제사 때, 명절 때가 되면 만나게 된다. 언니가 갑자기 청력을 잃고 난 후, 한동안은 만나지 못했다. 나는 명절마다, 제사마다 빠지지 않고 이모네 집에 방문했다. 그럴 때마다 언니는 집에 없었다. 아마 아주 깊은 물 속에서 뭍으로 올라오는 길을 잃었던 것 같다. 어떻게 수면 위로 올라왔는지는 묻지 않았다. 다만 언니를 꼭 안아주었다. “그렇지만, 내가 봤을 때 언니의 문제는 그거야.” “뭐? 내가 일반적이지도, 일반적이지 않지도 않다는 거?” 언니는 연이은 취업 낙방의 탓을 청력에게 돌렸다. 재택을 할 수 있는 직장에서는 주로 중증 장애를 가진 사람만 뽑았다. 그러니까 언니 말로는, 언니는 애매했다. 일반적인 것과 일반적이지 않은 것. 그 사이에 있는 사람이었다. 잘 들리지는 않지만, 아예 안 들리지는 않은. 말할 수 있지만 선명히 말할 수는 없는. 주류와 비주류, 그 사이 애매한 경계선에서 어느 쪽에도 제대로 포함되지 못하는 것.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언니의 고질적인 문제는 따로 있었다. “언니 너무 희망 직종이 자주 바뀌잖아..!” 소리를 높이려다가 간신히 낮추었다. 언니의 직종은 처음에는 경리였고 이제는 사서로 바뀌었다. 사실은 나도 알았다. 언니의 희망 직종이 왜 계속 바뀌는지. 언니는 세상에 언니 자신을 맞추려고 했다. 언니 목에 걸린 헤드폰처럼. 밖에 여섯 시가 되어야 마음 편히 나오게 된 언니의 시간처럼 말이다. 밥을 먹고 언니를 집에 보낼 때까지도 언니의 마지막 말에 선뜻 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언니, 다음부터 아침에 만나.” “갑자기?” “언니가 피하려는 게 사람이면 피하지 말자고. 이런 말 웃긴데, 뱀파이어, 그것도 어쨌든 사람이잖아.” 나는 언니의 목에 걸린 헤드폰을 슬쩍 들었다. 쓰지도 않을 거라 저렴한 거 샀다더니, 그래서 그런지 꽤나 무거웠다. 언니는 내 말에 별다른 대꾸 없이 버스를 타버렸지만, 다음 약속을 당연하다는 듯 오전 시간으로 잡았다. 그게. 해가 뜨는 이른 아침이었지만. 취준생도 건강을 챙겨야 한다며 한강을 뛰기로 했다. 내가 만나자고 한 거였지만 졸린 눈을 비비며 버스정류장에 앉아 언니를 기다렸다. 언니가 탄 버스도 머지 않아 도착했다. 그리고 머리를 깔쌈하게 묶은 언니가 빛을 받으며 버스에서 내렸다. 목에는 어떤 것도 걸려있지 않았다. 눈이 부셔 역광이라 눈을 작게 떠야 했지만, 언니만은 선명히 보였다. 우리는 눈이 마주치자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이른 아침부터 이러고 있는 게 웃겨서 오래 마주보고 웃었다. “뭐가 웃겨” 나도 내가 왜 웃는지 모르면서 언니에게 물었다. 그러자 언니는 대답했다. “너무 환해서. 너무 밝아서.”
2024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우수상 수상작 「할미의 도전」
“할미, 이것 좀 봐. 노인들에게 무료로 핸드폰 문자를 가르쳐 준대.” “다 늙어서 뭣을 배워. 싫어야.” “그러지 말고 한 번만 가봐. 내일 가보고도 싫으면 그때 안 한다고 해도 돼.” 내가 취직하면서 할머니와 같이 있을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다. 작년에 할머니의 친구분도 돌아가셔서 할머니가 많이 심심할 터였다. 할머니의 대화 상대가 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노인을 상대로 하는 평생교육을 냅다 신청해 버렸다. 부정적으로 이야기하지만, 할머니는 배움의 욕구가 높은 사람이었다. 글을 배울 적 할머니 표정을 다시 보고 싶었다. “할미, 오늘 같이 자자.” “이 똥강아지가 뭔일이대.” “별거 아냐.” “다 커서 징그럽다.” 말은 징그럽다고 하면서 할머니가 몸을 옮겨 내 자리를 마련했다. 옆에 누우니 할머니가 팔로 나를 감싸 안았다. 할머니의 체구가 작아서인지 품이 더 따듯했다. “나한테 가족은 할미뿐이야. 엄마고 아빠고 이제는 하나도 안 궁금해. 그러니깐 오래 살아야 돼.” “걱정 말어. 니 결혼하는 건 보고 갈 테니께.” “결혼하는 것만 보려고? 애 낳고 할머니 보고 싶으면 어떡해. 애 키우는 것까지만 보고 가.” “워매, 나 친구도 없이 백서른까지 살아야 하는 것이여라?” “할미도 연애해. 내일 수업 가면 멋쟁이 할아버지들 많을 거야.” “에잉, 남사스러워라.“ 꼭두새벽부터 할머니가 어수선하게 움직였다. 힘들게 눈을 뜨고 할머니를 쳐다봤다. 옷을 입고 벗길 여러 번, 어느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도움을 줄까 싶어서 한 옷을 집어 들고 얼굴색이 산다며 칭찬했다. 할머니는 배시시 웃으며 곧장 옷을 갈아입었다. “근데 할미, 9시에 수업 시작하는데 왜 벌써 준비하는 거야.” “알어. 니는 잠이나 더 자야.” 결국 나도 일어나서 평소보다 이르게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할머니는 내 앞에선 아닌 척해 보이려고 하지만 얼굴에서 기대감이 떠나가질 않았다. 할머니를 보니 나도 덩달아 설레는 기분이 좋았다. 할머니를 데려다주고 출근할 생각으로 할머니를 차에 태웠다. 차에 타고나서부터 할머니의 얼굴이 굳어갔다. 기대감이 긴장감으로 바뀐 게 눈에 보였다. 소녀스러운 할머니의 모습을 보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할머니가 자존심 상하지 않게 입술을 깨물고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입꼬리를 내리지 못했지만, 할머니에게 내 모습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 최수ㄴ자 - 할미, 생애 첫 문자 보낸 걸 축하해. 수업에서 이름 쓰는 방법을 배웠는지 할머니가 나에게 문자를 보내왔다. 정확하게 쓴 문자는 아니었지만, 할머니의 노력이 보이는 첫 문자였기에 나에게도 소중했다. 집에 돌아온 할머니는 나에게 오늘 무엇을 했고, 누구와 어떤 이야기를 나눴으며, 어땠는지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들뜬 건지 장황한 설명들이 끝나질 않았다. 오래간만에 의욕이 넘치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는 얼마든지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었다. “김씨 할아버지가 문자를 잘 보내드라고.” “이참에 김 씨 할아버지한테 문자 보내봐. 내가 도와줄게.” “휴대폰 번호가 없는데 어떻게 보낸댜.” “그럼 숙제. 내일 전화번호 받아오기.”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니 할머니가 나를 유달리 반겼다. 내게 보여준 쪽지에는 전화번호로 보이는 숫자가 적혀있었고 아마 김 씨 할아버지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김 씨 할아버지에게 보내고 싶은 문자 내용이라며 쪽지 뒷장을 내게 보여줬다. 두 줄로 찍찍 그은 흔적들이 얼마나 고민했는지 엿볼 수 있었다. 밤이 늦도록 글자 조합하는 연습은 계속되었다. 씻고 나오니 문자를 보내다가 뻗은 할머니가 보였다. 할머니의 핸드폰을 충전시켰다. 켜진 화면에는 문자가 적혀있었다. - 나의 손녀가 내 세상의 전부여요.
2024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우수상 수상작 「왜 자꾸 응원하세요?」
나는 뚱뚱하다. 태어날 땐 분명히 미숙아에 가까울 정도로 작았다는데, 부모님의 뜨거운 사랑이 과하다 못해 흘러넘쳤던 걸까? 난 여섯 살 이후로 늘 과체중이었다. TV에 나온 아이돌의 몸무게를 찾아보면, 여자건 남자건 내가 초등학교 때 이미 섭렵한 체중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대충 어느 정도인지 알겠지? 아주 그냥 어마어마했다니까! 사실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몸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뚱뚱한 것이 죄가 되는지 몰랐고 여덟아홉 살 먹은 친구들도 내 몸을 평가하는 것보다는 집에 일찍 들어가 <커피프린스 1호점〉 재방송을 보는 게 더 중요했다. 오히려 또래보다 덩치가 크다는 이유로 ‘조폭 마누라’라는 타이틀이 붙었고 그 별명에 꽤 만족해하며 학교를 다녔다. 문제는 나이가 두 자릿수로 바뀐 해부터 시작되었다. 어느 순간 나는 말괄량이 학생이 아닌 ‘여자’가 되어버렸다. 그 이후 뚱뚱한 여자라는 이유로 온갖 손가락질과 모진 말들을 듣기 시작했다. 학교에 가면 여학생들을 A급, B급으로 등급 매기던 동급생들부터, 사이즈가 맞지 않는 체육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대체 몇 킬로냐”며 대놓고 창피를 주었던 선생님. 그리고 손가락, 발가락을 모조리 써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의 묘한 눈빛들. 그럴 때마다 나는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습관적으로 자학 섞인 말들을 내뱉기 시작했던 시기도 아마 그때쯤이다. 누가 내 몸을 보고 욕하기 전에 스스로를 먼저 깎아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 뚱뚱해” “나 살쪄서 너네랑 못 다녀” 몸에 배어버린 자기 비하는 남들에게 상처 받기 전에 미리 놓아두는 예방 주사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왜 그랬나 싶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차라리 그편이 나았다. 자존심이 강했던 나에겐 그런 ‘쿨’함이라도 필요했으니까. 그러나 매일 수십 번씩 놓는 예방 주사는 자해와 다를 게 없었고, 나는 몇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그 이후에도 내 몸은 여전히 창피했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고 ‘뚱뚱한 여자’라는 이름표 가리기에 집착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 나름의 노력 끝에, 나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내 몸을 혐오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거울에 비친 몸을 보아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 상태. 그제야 모든 것이 제자리로 되돌아온 듯했다. 하지만 세상은 마치 나를 괴롭히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것처럼 늘 한발 앞서 갔다. 사람들은 이제 대놓고 깎아내리는 방식이 아닌, ‘동정’ 섞인 응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혹여나 피해 의식은 아닐까, 그들의 말을 두세 번씩 곱씹어보아도 결과는 같았다. 겉만 번지르르할 뿐, 다른 이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과거와 다르지 않았다. “뚱뚱한 여자가 저런 옷을 입다니 정말 당당해!” “뚱뚱한데 기죽지 않고 저런 말을 하다니 멋져!” 어느 순간부터 늘 ‘당당하고 멋지다’는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왔다. 마치 뚱뚱함이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은 내가 대견하다는 듯이. 몇몇 사람들은 “어쨌거나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좋은 것 아니냐”며 되물었다. 하지만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뚱뚱한 여자는 불행해야만 하는 존재였다. 시혜적인 시선으로 동정하는 태도는 생각보다 불쾌했다. 정상 체중의 여성이 했다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행동과 말들이 내가 하면 대단하고 용기 있는 일이 되었고, 나는 어느 순간 응원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 되어버렸다. 동정 섞인 응원과 칭찬은 과거의 혐오 섞인 말들과 다르지 않았다. 내 몸은 여전히 타인의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체감한 순간 나는 또다시 거울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저 나로서 살아가고 싶을 뿐인데, 세상이 나서서 계속 뚱뚱한 여자라는 프레임 속에 가둬 놓는다. 타인에 의해 영원히 대상화되어야 하며 절대로 이 굴레를 빠져나올 수 없도록 말이다. 나는 따뜻하게 봐줘야 하는 대상도, 응원해 줘야 하는 대상도 아니다. 단지 뚱뚱할 뿐이다. 당신들의 도덕적 만족감을 위해서라면 굳이 응원해 주지 않아도 된다. 여러분, 응원 안 해주셔도 괜찮아요. 아니, 제가 정말 필요 없어서 그렇다니까요?
2024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장려상 수상작 「필통을 채우며」
“새 필통 너무 예쁘다. 볼펜은 엄마가 사줄게.” 엄마는 지금 서점의 문구 코너 앞에서 신이 나 있다. 환갑이 훌쩍 넘은 엄마가 문구 코너에서 볼펜을 고르는 순간이 너무 생경해 나는 더워진 날씨에 땀 젖었을 엄마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고 섰다. 몇 달 전, 합격증을 들이밀며 37살에 다시 대학에 간다는 말을 꺼낼 때만 해도 나는 엄마의 표정에서 지난 세월의 지난함이나 격정 따위를 읽을 줄 알았다. 근데 예상과는 달리 저렇게 생기 있을 줄이야……. 입학한 건 나인데, 이상하게 엄마가 더 신나 있다. 음, 난 저 정도는 아닌데? 뭐가 저렇게 신났지 나보다? 엄마가 저렇게 신이 난 게 꽤 오랜만이다. 사람들 사이를 겨우 비집어 엄마 손목을 낚아채려다 방해 공작을 그만두었다. 그래, 책 사러 오길 잘했다. 그렇게 생각하고는 그냥 푸하하 웃었다. 귀찮아서 책을 인터넷에서 살까 했더니 하마터면 보지 못했을 진풍경이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식당을 예약한 시간이 가까워져 오니 불안해 죽겠는데 볼펜 몇 개를 마치 싱싱한 야채 고르듯 하나씩 집어 꼼꼼히도 본다. 이미 문구 코너 쪽 길게 붙어있는 흰 종이에 내 이름을 썼다 지웠다 반복하며 집어 든 볼펜이 열 자루가 넘는다. 손도 작으면서 대체 저 주먹 뭉치만 한 볼펜은 어떻게 다 쥐고 있지. 놀라울 정도다. 저건 돈 주고는 살 수 없는 대단한 지구력이다. 늘 무기력한 나와는 달리 저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동력에 경탄하고 만다. 정말 대단해! 사실 수업에 필기도구가 크게 필요 없다. 수업 내용은 노트북으로 정리하는 게 편리하다. 불필요할 것 같아 ‘안 사도 돼’ 하고 입을 떼려다 요리조리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형형색색의 볼펜들을 쏙쏙 뽑아내는(그러나 내 취향과는 거리가 먼) 소녀 같은 모습을 보며 이내 입술을 앙다물었다. “내가 이런 걸 고르는 날이 또 올 줄이야. 인생 재밌지 않니?” 엄마는 얼마 전 퇴원을 했다. 암이라는 게 대부분 그렇듯 좋아지다 가도 나빠지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엄마의 50대는 여행이나 모임, 소비와 같은 즐거움이 별로 없다. 대부분 집과 병원을 오가느라 방전된 체력을 보충하기에도 바빴다. 항암 부작용에 몇 번씩이나 위액을 게워 내고, 대항할 수 없는 고통에 밤을 새우면서도 엄마는 참 씩씩했다. 성당에 나가 열심히 기도도 하고, 꾸준히 운동도 했다. 오히려 잘 이겨내는 엄마와는 달리 내가 이 시기를 꽤 방황하며 보냈다. 다 지나가리라 마음먹었다가도 기분이 하루에 몇 수십번씩 천국과 지옥을 번갈아 움직였다. 이 시기쯤 나는 처연한 영화의 주인공처럼 세상 시름에 빙의해 있었다. 이유 없이 어두운 날이 많았고 곧잘 화를 냈다. 마음 고쳐먹을 새도 없이 시간은 고삐를 잡지 못한 채 쏜살같이 지나 어느새 난 수염이 거뭇한 못난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근데 삶이 꼭 불편한 계절만 있겠는가. 누구에게든 임계점이 오는 순간이 있다. 하루는 성당에서 기도하고 나오는 엄마에게 백날 무슨 기도를 그렇게 하느냐고 쏘았다. 그러자 나를 올려다보며 엄마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 너 즐겁게 살라고 기도했어.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이 위로를 해주다니.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다. 즐겁게…… 익숙한 단어였는데, 순간 하염없이 낯설게 느껴졌다. 갑자기 눈물이 콱- 하고 차올랐다. 이유가 별 게 있을까. 나는 엄마에게 부끄럽고 미안했던 거다. 자기 걱정해도 모자랄 판국에 내 걱정을 하는 엄마를 보면서.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시름을 씻었다. 덕분이었는지 우리는 그 길고 지루한 암 투병 생활을 참 잘 버텼다. 암이라는 얘기를 처음 듣던 날, 유난히 발목이 앙상해 보이던 병원 침대, 수술비를 벌기 위해 새벽마다 첫 버스를 타던 눈 시린 일출까지. 우리 모자의 십여 년이 넘는 희로애락은 저 소녀 같은 뒷모습, 그 가냘픈 목주름에 다 들어있다. 그런 파도를 겪고 나서도 엄마는 살아있기에 인생이 너무 재밌다고 말했다. 퇴원하던 날, 중국집에서 입가에 짜장을 잔뜩 묻히고 면을 오물거리며 희망을 예찬하던 그 천진난만함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쩌면 그래서 궁금했던 걸까. 뒤늦게 대학을 다시 가기로 마음먹는 건 꽤 쉬운 일이었다. 그저 궁금했다. 즐겁게 산다는 것, 그것을 위해서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삶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을. 1년 전까지만 해도 누가 알았으랴. 내가 다시 대학생이 되고, 엄마가 이렇게 거뜬히 걸어 다닐 줄. 엄마 말마따나 인생 정말 한 치 앞을 모르는 거라 재밌다. 어쩌면 결말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더 놀라운 것일지도? 나는 내가 세월 풍파를 잘 겪어낸 어른인 줄 알았다. 근데 몸만 비대해졌지 여전히 삶에 대해 느끼는 게 좁다.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저기에 지금 포대기만 없지, 내가 업혀 있는 거다. 엄마를 통해 배운 긍정의 지구력을 몰랐다면, 나는 여전히 방황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삶의 재미를 찾게 해줘서 나는 저 볼펜을 쥐고 있는 작은 손의 주인을 사랑한다. 고마워 엄…… 아니 잠깐만. 그걸 다 사게? 그만큼 필요 없는데? 엄마 그만! 그마아안! 긴 영수증을 쇼핑백 안에 넣으며 엄마를 채근해 서점을 나왔다. 옜다, 하고는 건네준 쇼핑백이 꽤 묵직하다. 누가 보면 국가고시라도 준비하는 줄 알겠다. 창피하게 정말! 쇼핑백 안엔 영수증의 길이만큼 엄마의 마음이 채워져 있다. 맛있는 식당을 예약했다고 자랑하며 슬쩍 팔짱을 껴본다. 저녁엔 카페에서 함께 필통을 채우며 나는 생각할 것이다. 나도 누군가를 뜨겁게 응원할 수 있는 담대함을 가져야지. 다시 한번 열렬히 삶을 사랑해야지. 다음 주는 강의실에 ‘노트’를 들고 갈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담긴 볼펜을 꾹꾹 눌러쓰며 엄마에게 사진도 찍어 보낼 것이다. 부드럽게 써지는 것으로 잘 골랐다며 너스레를 떨어야지. 극복은 온다. 삶의 예리함 만큼 둥근 시간도 반드시 올 것이다. 그러고 나면 나를 살게 하는 새로운 이유가 생긴다. 나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꼭 말하고 싶다. 나도 했다! 당신도! 할! 수! 있다!
2024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장려상 수상작 「세 번째 스무 살」
아빠는 올해로 세 번째 스무 살을 맞이했다. 환갑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환갑은 돌아올 환(還)자에 첫째 천간 갑(甲)자를 쓴다고 했다. 아빠는 환갑을 기념으로 친인척들이 모여 식사하는 자리에서 올해를 기점으로 전부 제자리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농담처럼 웃었다. 아빠는 종종 진심을 농담처럼 꾸며 말하곤 했다. 나는 아빠의 눈가를 바라봤다. 주름이 깊었다. 5년 전, 아빠는 대장암 3기 판정을 받았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아빠가 없는 집이 쓸쓸하고 낯설어서 하교를 하면 아빠가 있는 병원으로 갔다. 워낙 풍채가 좋았던 아빠가 야위어가는 모습이 보였지만 아빠의 농담은 변하지 않았다. “전부터 다이어트하라고 잔소리만 듣다가 이번에 다이어트 제대로 해보네. 힘들다, 이거.” 장난스럽게 자신의 배를 두드리는 아빠의 손등에 꽂힌 주삿바늘이 보였지만, 못 본 척 웃으며 꼭 퇴원하면 술부터 끊으라고 잔소리를 얹는 게 나와 아빠의 대화 방식이었다. 아빠의 퇴원은 불투명한 미래였지만 우리는 가까운 미래처럼 퇴원 이후의 일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2년이 지나고 아빠의 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져서 통원 치료를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의사의 말에 나는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을 믿게 되었다. 무심코 버려뒀던 씨앗이 나도 모르는 새에 비와 바람을 맞고 무럭무럭 자라서 열매를 맺은 것만 같았다. 아빠가 통원 치료를 하며 점점 일상에 적응해 갈 때쯤 코로나가 세상을 덮쳤다. 아빠는 작은 컴퓨터 부품 조립 공장을 운영했었는데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자, 요즘 이런 부품들은 기계가 조립해 주지 누가 사람을 쓰냐며 일거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빠는 자신이 병원에 머물 동안 세상이 빠르게 변했다며 씁쓸해하다가도 이런 때일수록 뭐라도 해야 한다고 했다. 20년간 운영해 오던 공장을 정리하고 페인트 사업을 시작해 볼까, 고민하던 아빠에게 작은 아빠가 다가왔다. 작은 아빠는 아빠와 12살 터울의 어린 동생이었는데, 아빠 말로는 자신이 업어 키웠다고 했다. 그렇게 업어 키운 어린 동생이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사업 자금을 들고 튈 줄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아빠가 환갑을 맞이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아빠의 환갑 잔치에서 작은 아빠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내 기억 속의 아빠는 안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액땜이라며 분명 더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늘 가족을 안심 시켜주던 사람이었고, 늘 어려운 상황을 돌파해 냈다. 하지만 아빠는 이제 늙어버린 자신을 한탄하는 날들만 많아졌다. 어려워진 상황을 헤쳐 나갈 용기가 사라지고 점점 자신의 존재가 가족들에게서 지워져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점점 웃는 날이 줄어갔다. 농담도 하지 않았다. 작은 아빠에게 사기를 당한 이후, 아빠는 종종 집에서 헤드폰을 끼고 있었다. 주변 소리가 아무것도 안 들리고 음악 소리만 들린다며 좋아하는 아빠가 저 조그만 헤드폰 속에 자신을 숨기는 것만 같았다. 잡생각이 안 들어서 좋다는 아빠한테 세상 돌아가는 소리가 그렇게 무섭냐고 묻고 싶었는데, 정말 그렇다고 대답할까 봐 차마 물어보지도 못했다. “아빠한테 필요한 건 헤드폰이 아니야.” 개강이 다가오자 자취방으로 내려가는 길에 운전하던 언니는 나에게 말했다.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럼 아빠한테 필요한 건 대체 뭘까?” “몰라. 찾아봐야지.” 나는 차창 밖을 바라보며 아빠에게 무엇이 필요한 건지 생각해 보다가 문득 작년을 떠올렸다. 작년에 나는 잘 다니던 학교를 관두고 다른 학교로 가기 위해 엄마, 아빠 몰래 다시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비밀로 할 일은 아니었지만 합격 결과가 나와야 떳떳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시험을 봤다. 시험을 보고 나온 뒤에 뒤숭숭한 마음을 참을 수 없어 나는 결국 저녁을 먹다가 엄마와 아빠한테 털어놓았다. “사실 다른 학교 시험을 보고 왔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생겼거든.” 엄마와 아빠는 이런 중요한 얘기를 왜 말 안 해줬냐며 섭섭함에 화를 내다가도 내 얼굴을 바라보며 한참 말을 아꼈다. 적막이 가라앉은 식탁에서 아빠 입을 열었다. “아빠도 이십 대였으면 이런저런 도전 다 해봤을 거야. 아빤 응원해.” 아빠의 말을 시작으로 분위기는 누그러졌다. 우리는 식탁 위에서 아빠가 입원했을 당시처럼 불투명한 미래를 가까운 미래처럼 얘기하기 시작했다. 합격하지도 않은 대학에서 생활하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그렇게 웃고 떠들었다. 그리고 얼마 뒤에 나는 합격 소식을 들었다. 또 다른 열매가 맺힌 것이었다. 나는 아빠와 같은 나이가 되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무언가에 도전할 용기를 낼 수 있을까. 그런 마음이 과연 나에게도 생길까. 20년간 해오던 일을 관둘 거란 결심은 작년에 내가 느꼈던 두려움보다 훨씬 크고 깊었을 텐데, 아빠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아빠의 응원으로 피어난 열매를 나는 왜 아빠에게 나눠주지 못했지. 나는 아빠에게 문자를 보냈다. 뜬금없는 일이었다. ‘아빠. 도전한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인 것 같아. 아빠를 응원해. 우린 잘될 거야.’ 아빠는 답장이 없었다. 쿨하네. 그러다가 며칠 뒤, 수업 중에 갑자기 알림이 울려서 문자를 확인해 봤더니 ‘딸. 아빠. 완치.^^’ 아빠의 건강이 돌아왔다. 내시경 결과를 들으러 병원에 간 아빠는 드디어 의사에게서 완치 판정을 받은 것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환갑은 돌아올 환(還) 자를 쓴다고 했다. 나는 아빠에게서 돌아올 것들을 기대하게 된다. 그리고 아빠가 많은 것들을 도전해 봤으면 좋겠다. 세 번째로 맞이하는 아빠의 스무 살을 나는 늘 응원할 테니까.